모멸과 굴욕
삶을 견디는 한 방편
한 개인이 특정 상황을 온통 뒤바꾼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의 중국 대륙을 통일했던 진의 시황제가 그렇고, 사물의 움직임을 작은 돌멩이에서 우주의 천체까지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었던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그렇습니다. (천재 한 명이 역사를 바꾼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그렇기에 ‘보인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렇지만 한 개인이 그 스스로 힘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보통 평범한 사람의 대부분 일상이 그럴 것입니다. 더더구나 그 상황이라는 것이 조금 떨어져서 볼 때 ‘역사의 흐름’ 또는 ‘체제의 변화’ 같은 설명을 붙일 수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어제 영화 한 편을 봤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떠올린 단어가 [모멸], [굴욕]이었습니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 원만한 가정 및 사회 환경에서 가지고 있을 <자존감>이라는 게 있습니다. 부모 등의 가족에게 사랑을 받고, 스스로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며, 그래서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다양한 의미로 ‘쓸모 있음’을 주장하며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순간, 어떤 상황에서는 개인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것도 있을 겁니다. 말 그대로 해일이 밀려올 때 같은 순간입니다. 그 사람이 쌓아온 교양이나 지식도 필요 없고, 사회 관계가 말해주는 영향력도 소용없습니다. 오로지 “생존”만이 문제될 때 말입니다. 더더구나 그 개인의 주변과 상황이 변하는 속도가 말 그대로 “격변”일 때 말입니다.
인생(1994) "To Live, 人生"
‘위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장예모(장이머우) 감독, 갈우, 공리(궁리) 주연의 1994년작 중국 영화입니다. 장 감독은《붉은 수수밭》으로 유명하고, 공리는 너무 유명한 배우이므로 설명을 생략합니다. 영화 원래 제목은 活着(훠져(huó zhe), 살아간다는 것, Lifetimes)입니다.
작가 위화(Yu Hua, 余華)는 두 번째 장편소설 『인생』(1993)을 통해 작가로서 확실한 기반을 다졌습니다. 『허삼관 매혈기』(1996)가 국내 독자에게 더 친숙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영화 포스터를 보면서 주인공이 겪을 이야기를 상상해봅시다. 영화에는 40년대-국공내전, 50년대-대약진 운동, 60년대~70년대-문화대혁명 속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살아냈는지 나옵니다.
업신여김을 당하는 기분
단어 자체에 대해 생각을 해봅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단어와 뜻은 대강 알지만, 한자는 한 번도 직접 써본 적이 없는 듯합니다.
•모멸(侮蔑): 업신여기고 얕잡아 봄. (侮 업신여길 모, 蔑 업신여길 멸)
•굴욕(屈辱): 남에게 억눌리어 업신여김을 받음 (屈 굽힐 굴, 옷 이름 궐, 辱 욕될 욕)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모멸(侮蔑)은 다른 사람을 경멸, 비하하고 조롱하고 무시하는 행위의 총칭이다. [출처: 위키대백과]
(* 위키대백과에 학문 권위를 부여하지 않으나 인용의 편리함 때문에 가끔 사용할 예정임.)
이 단어는 상대방이 나를 낮추어보고, 얕잡아보고 함부로 대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행위를 <당하는 기분>입니다. 즉, 모멸감이나 굴욕감입니다.
잠시 인정한다는 것
전쟁 포로를 다루는 심리전에서 가장 악질이 모멸감이나 굴욕감을 무한 반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당하는 기분의 반복) 사람의 몸과 마음이 아주 쉽게 무너진답니다.
아주 활력 넘치게 일했던 중년이 퇴직 후에 무기력하게 뒷방 어르신이 되는 경우를 듣거나 보셨을 겁니다. 몇 가지 사건이나(퇴직 등) 몇 종류의 이벤트(인정 못 받음 등)에서 모멸과 굴욕을 느꼈기 때문일 겁니다. 겪어본 분들은 인정하겠지만, 사람이 한없이 무기력 해집니다. 이런 경우에 아차 하면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무엇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잠시 인정하는 겁니다. 개인의 지력이나 해석이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그 어떤 상태나 상황으로 인정하면서 잠시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너무 소극 행동 아니냐 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인정과 감당과 수용이 있으려면 자신의 그런 감정을 먼저 ‘알아차려야’ 합니다. (앞으로도 여러 번 말할 것 같지만, 이 ‘알아차림’은 어마어마한 능력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재 객관 능력이나 보유 자원도 좀 더 쉽게 헤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시만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못 알아차리고 계속 감당만 한다면 무력한 전쟁포로가 되겠지요.)
세상이 여러분에게 침을 뱉을 때, 세상에게 어떤 질문을 하겠습니까?
역사가 여러분에게 욕을 합니다. 그렇다면 깃발에 적어 세워 둘 질문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잠시만 참는 것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이 무한정 지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 집단 면역력을 갖추거나, 언제인가 백신이나 치료약이 나올 겁니다. (물론 새로운 질병 상태를 맞이할 가능성이 있지만요.)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전체 인류가 관여된 최초의 비극 경험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른 여러 성찰 지점(세계화와 생태 등)이 있겠지만, 개개인의 측면에서는 작금의 해일 같은 상황과 격변의 상태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혼자만 겪거나, 혼자만 불행하지 않는 일이라고 여기는 약간의 뻔뻔함 같은 것도 필요합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닙니다. 마지막에 살아 남은 자가 강한 자입니다. 우리는 살아내야 합니다.
알아차림이 필요한 만큼 ‘관찰’도 필수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모든 분에게 항상 건강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