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본심에도 못 올라간 작품이기는 합니다. (시무룩 ^^*)
한 개인(인간, 주체)가 사회의 구조(프레임)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그 속에서 개인이 가져야 하는 성찰(깨우침, 알아차림)이 어떤 의미나 지향을 가져야 하는지 미래 시점으로 써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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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 코칭 / 학부모 코칭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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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
자세를 고쳐앉는 민들레와 토끼풀이 울타리 타고 넘어오면서 소리도 없다.
야,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그게 어째서 내 탓이냐? 넌 뭘 잘못 먹었길래 아침 댓바람부터 엉뚱한 시비냐? 공주님 식탁에서 개구리 뼈 발라 먹는 소리 같은 거 하지 말고! 잠도 제대로 못 자 힘들어 죽겠구먼. 끊어! 나중에 연락 한 번 더 해! 내가 짱박아 둔 아주 고급 고량주 있어.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무협지 읽고 격투기 배웠다는 말이지? 아이고 이놈아, 네가 무식하다는 소리는 절대 안 하는구나? 아, 아, 알았어. 알았다고! 소리 좀 낮춰. 일흔도 넘긴 놈이 목울대에만 기운이 넘치냐? 나도 그냥 확 소리 질러 버릴까 보다. 그리고 ‘그림자 노동’이라고 들어는 봤어? 너무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조금 미안하다만, 네 며느리하고 막내딸이 하는 일이 인공지능하고 플랫폼 돌리는 일이야. 많은 여성 노동이 눈에 안 보여서 그렇지. 이제 살살 그만하자. 피곤해 죽겠구먼. 아니, 기본 소득 지급 법안이 보편 제도로 안 된 게 왜 내 탓이냐? 야, 인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정치를 내가 하냐? 알았어. 이해해. 알아들어.
남태평양 출신이라는 8월 습기가 엄청나게 줄어든 특별한 날이 며칠 계속된다. 사무 공간 사이 공기는 쾌적하다. 자잘한 백색 소음은 호쾌하다. 그렇지만 홀로그램 통신기 너머에 출현한 녀석은 어지간히 심각했나 보다.
여기는 인공위성 데이터 지상 기지국. 지금 일하는 사람은 모레까지 올해 상반기에 이루어진 모든 데이터 활동을 백업해야 한다. 만약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에 대비한 보안 장치를 3중으로 걸어야 한다. 반수면 밤샘한 상태이다. 내 신경 줄이 극도로 팽팽할 텐데 그나마 습기가 줄어든 날씨 덕분에 기계도 별로 속 썩이지 않고 적당하게 잘 가동되었다. 신이 있다면 도운 날씨이다. 그래서였는지 녀석의 홀로그램 호출도 원만히 유쾌하게 받아들인 듯하다. 일 년에 두 번 있는 이 작업은 이곳이 하는 일 가운데 중요도나 비중이 꽤 큰 편이다. 고객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이 작업에 오류가 생기면 나와 동료는 8월 한 달 내내 아무 생각 없이 모든 사사로운 일을 그냥 포기해야 한다. 데이터 복구 작업에만 매달려야 한다.
위성 운영은 어렵고 복잡하고 돈 많이 드는 일이다. 이를 대신해주는 기업이 결국 등장한다. 바로 지금, 이 지상 기지국을 운영하는 회사이다. 위성을 운영하는 고객이 데이터를 주고받는 소요 시간과 데이터 양에 따라 타당한 돈을 받는 게 사업 방식이다. 회사는 지상 기지국을 전 세계에 72개 깔아두고 운영하고 있다. 지구 위에 있는 위성이 어느 위치와 각도에 있든 매 순간 데이터를 받을 수 있는 시설이다. 당연하게 이 지상 기지국은 어마어마한 용량을 가진 통신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인터넷에 기초하여 특수 용도로 발전된 트라이엘넷(TriL-Net)으로 접속된 고객은 언제든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사실 내 온라인 별명이 ‘청년’일 뿐이다. 이 회사 근속한 지가 15년 되었고 그전에도 이와 비슷한 영역을 활보했다. 위성이 보내는 데이터는 지구에 도착하기까지 다양한 이유로 영향을 받아 오류를 반드시 포함하게 된다. 데이터를 해석하고 교정하는 <정보 이론>은 매우 잘 체계화되어있다. 그런데도 잡음 데이터를 관리하는 미세한 기술이 내 경력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쑥스럽지만 폐기 결정된 중형 위성 두 대가 나의 조언으로 수명 연장 판정을 받았다. 이 사건은 업계에서만 유명한 일화도 아니다. 그 위성은 중앙아메리카와 아마존 밀림 위를 스캐닝했다. 식물 때문에, 또는 지하에 매몰되었기 때문에, 관찰 안 되는 고대 아즈텍이나 마야 문명 흔적을 또는 지하자원을 찾는 역할을 하였다. 유네스코와 멕시코 문화부와 브라질 산업 진흥부는 모두 나를 잘 알고 있다.
남자 일하고 퇴근한다.
이 기지국에 출근하게 된 데는 행운이 크게 작용하였다. 인연과 영어 운이다. 중간에 짬짬이 눈을 붙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밤샘이다. 지금은 오전 10시. 동트면서 장끼가 울 때부터 영혼에 쏟아부은 카페인만 해도 벌써 2잔째이다. 인수인계도 대부분 끝났고 곧 있으면 퇴근해서 12시쯤에 집밥을 먹을 예정이다.
안녕, 출근은 잘했어? 별일 없었고? 응, 약간 졸려. 곧 있으면 퇴근이야. 집에 가서 밥 먹으려고. 그런데 그 가상현실 투표 꼭 해야 해? 안 하면 안 될까? 왜긴 왜야? 졸려서 그렇지. 그냥 집에 가서 발 씻고 뻗을래. 아니, 기본 소득을 공동체가 뭐하러 사람에게 제공하냐고? 기본 소득도 맘에 안 드는데, 시행하려면 다 같이 하지 왜 또 여자 먼저 줘? 그조차 35세 이상으로 제한 두어서 하냐고? 일도 안 하는 사람에게 공동체는 왜 돈을 줘? 왜 여자만 줘? 일 안 하는 남자는 밥 안 먹고, 돈 안 필요해? 그리고 취직했으면 월급 받은 돈으로 사는 게 당연하지 왜 계속 지급하냐고? 젊은이야말로 돈이 더 필요하지. 왜 35세 이상으로 선을 긋는 이유는 또 뭐야? 다음번에 자기네가 원로 평의회 구성하게 되면 완전 보편 제도로 한다는 데 웃기고 있어요. 칼을 들고 자기네 찍어 달라고 협박을 하면 차라리 현실 같기라도 하지. 이름도 웃겨요. 자기가 원로래. 자기도 이해 못 하는 말 내뱉냐고? 그리스 신화 흉내 내는 씨네그램은 엄청나게 봤어요. 하여간 실망할지 모르지만, 일단 피곤하니까 그냥 집으로 갈 거야. 아니, 소금 친 미꾸라지처럼 뛰고 그래? 여보세요? 야, 뭐야? 왜 그래?
홀로그램 통신기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건너편 목소리는 파트너이다. 대화 끝 무렵에 욕을 엄청나게 얻어먹었다. “구린내 나는 쓰레기를 아무리 예쁜 보자기에 싸서 내밀어도 쓰레기는 오물통에 가기 마련이야!” 이 기지국 행정직은 고객 서비스와 사실 아무 상관이 없다. 대부분 업무가 프로그래밍으로 작성되어 있고 당연히 자동화되어 있다. 다만, 옛날 UN과 비슷한 <무역 정보 교류 공동체>라는 기구가 정한 국경 같은 <데이터 경계선>이라는 게 있다. 본사가 다른 경계 안에 있고 기지국은 길쭉한 반도 경계 안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서류 수발을 해야 할 뿐이다.
영어를 약간 하는 능력은 20여 년 전 태어난 세대에게 특별한 일도 아니다. 요즘 또래에게 가상현실, 증강현실 그리고 혼합현실은 기본 기술이다. 그 기술의 최신 히트작이 ‘당신에게 현실을~!’하고 외치는 U2R 서비스이다. 또래 모두는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그 서비스를 통달하여 태어난다고 봐야 한다. 그곳은 당연히 다국어 세상이다. 지금, 이 기지국이 영어를 공용으로 쓸 뿐이지, 몇 사람 근무 안 하는데 오가는 욕 종류만 적어도 4가지 언어는 된다.
청년이 친구 4명과 시끄럽게 볼링을 치고 있을 때, 옆 레인에 있었다. 혹시 볼링 칠 때 흔하게 펼쳐지는 그 우아한 사교 예절을 아는가? 우연히 레인에 같이 올라섰을 때 먼저 하라고 양보하면서 손바닥을 뒤집어 펴서 앞으로 쭉 내미는 그 동작. 10 프레임을 치는 동안 4번이나 청년과 같이 섰다. 그때마다 양보를 자연스럽게 했다. 이쪽 레인 무리도 시끄럽기는 어지간했지만, 저쪽 청년 무리도 만만치 않았다. 볼링 치면서 열린 사회 이야기는 뭐 하려 할까? 듣자 하니 어떤 이는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유명 구절을 상대 점수 상황에 비유해 읊어대고 있었다. 파트너 덕분이었다. 저런 단어를 알아들은 교양은 데이트 때 들었던 설명 덕분이었다. 서로 경기가 끝나고 손 씻으러 가는 도중에 아는 체를 했다. 청년 무리가 뿜어내는 열정에 경외를 밝혔다. 하여간 인연은 그랬다.
여기 기지국 노동은 소장만 빼고 모두 이상한 계약 관계이다. 노동자는 급여를 받기 위해 생체 정보를 신분증 용도로 트라이엘넷에 일단 등록시켜야 한다. 이 방식은 MB라는 회사에서 전체 지구상에 표준화시킨 정맥 정보와 홍채 정보를 활용한다. (쓸모없는 뒷이야기이지만, 이 회사는 파벌 싸움으로 유명하다. 회사 설립자를 정통으로 이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3대째 경영 승계자가 있다) 사회보장 서비스는 모두 이 생체 정보를 기반으로 한다. 일하는 시간과 노동 품질은 거의 자동으로 점검되고 계산된다. 나중에 급여로 환산되어 입금된다. 문제는 ‘거의’라는 부분이다. 계산 방식에 오류는 없지만, 기지국 소장 같은 특별한 고용 관계에 있는 사람이 개입하여 조정할 권한이 있다. 이 권한과 방식이 사람을 아주 추잡하고 환장하게 만든다는 증명이 있다. 작년에 일어난 트라이엘넷 방화 사건이 대표이다. 누군가 불 지른 이야기를 지금 할까? 아니, 나중에 하자. 시간이 없어 미리 살짝 이야기하자면, 방화범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 만세~~~!!! (기대하시라, 2편을!)
이런 노동 계약에서 아마도 가장 심한 피해는 행정직일 터이다. 지금 밤샘을 한 이유도 업무 분담을 넘어선 일이다. 오로지 부뚜막에 앉아있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때이다. 그래서 급하게 지도받아가며 하게 된 셈이다. (물론 그사이에 어깨너머로 틈틈이 익혀온 눈썰미를 알아챈 다른 사람이 있었다) 예전 같으면 밤샘한 노동 시간과 노동 성과에 소장이 어떻게 개입할지 벨 꼴려 드러누웠을 텐데 그나마 지금은 낫다. 파트너가 시키는 권유대로 투표 안 한다고 몇 마디 생각을 드러냈을 뿐인데 이별 선언 앱이 활성화될 처지이다.
어찌 되었든 기본 소득과 기본 일자리를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시대이기는 하다. 그런데도 누구나 다 인정하는 이상한 격차가 명확하다. ‘데이터 경제국’이 정한 모호한 기준으로 이상한 격차는 더 심해진 상태이다. 다만 통계가 눈 가리고 아웅 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진짜 퇴근이다. 모레 만납시다.
여자 일하러 출근하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고, 옷깃이 왼쪽으로 살짝 내려갔을 때 목덜미 부근에 문신이 드러난다. 요람 모양이다. 그 밑에는 ‘BRAVE, NOT PERFECT’라고 적혀있다. 중세 켈트족 전투에서나 들을법한 구호 같은 게다. 글자 밑에는 깊게 베인 상처가 깔려있다.
항상 손에 들고 다니는 장난감은 스위스 아미 나이프 중 제일 작은 제품이다. 워낙 오랫동안 사용했던 물건이라 어떤 날이든 눈감고 손가락으로 튕겨 꺼낼 수 있다. 그렇다고 헐렁이라 오해 마시라. 튕겨내는 손가락에 그 정도 힘이 들어갈 때까지 얼마나 연습했겠는가? 직접 해보지는 않았지만 느린 동작 화면으로 보면 아마 중국 무협 영화처럼 보일듯한 장면이다.
오늘 아침 출근길은 레벨4 자율주행차를 호출한 덕분에 밤샘에 필요한 도구를 챙기고도 기사님과 수다 떨면서 편하게 기지국까지 왔다. 다방이 사라졌듯이 택시라는 게 흔적만 남아있다. 한때 전 지구촌 교통망을 장악한다고 기세등등하던 우버가 망한 지 벌써 몇 년 전이다. 현장 운전사에게 줘야 할 이익을 노예처럼 대하는 차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본 소득 혜택을 본 일부 개발자가 공개 소스로 이용자와 운전자를 연결해주는 앱을 만들어 공개해버렸다. 클라우드 운영비는 어떤 독지가가 《브이 포 벤데타》에 나오는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나타나서 향후 100년 치를 ‘공동 경제 노동 위원회’ 이름으로 맡기었다. 당연히 수수료 없는 공유 경제가 처음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수수료 없는 공유 경제이다! 노동자가 만든 이윤을 플랫폼이라는 명목으로 골 빼먹는 한 축이 무너진 시대가 왔다. 이용자는 우버만큼 편리하고 운전자는 만족스러운 노동 대가를 지불받는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이 서비스 영역으로 진입하는 노동자가 별다른 거름 장치 없이 꾸준하게 늘어나는 게 오히려 문제인 상황이다. CEO 종족은 기업가 정신이 사라진다고 하면서 마른 입술에 침도 못 바르고 있다.
“안녕!” 작게 낸 목소리이지만 낮아진 습도 덕분에 기지국 사무실 전체에 “팅~!” 하면서 골고루 퍼진다. 청년이 친구로 보이는 사람과 홀로그램 통신기를 사용하고 있다. 두세 시간 밖에 그것도 쪽잠으로 잤을 텐데 청년이 보여주는 밝은 얼굴과 약간 상기된 목소리가 밤샘할 생각으로 칙칙했던 기분을 조금은 가려준다.
저기요, 언니~! 누구랑 통화하셨어요? 친구가 언니보고 일자리 없애는 사람이래요? 웃자고 한 거지요? 다른 사람은 그렇게 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진짜 어이없는 상황은 눈에 안 보이는 거 아녜요? ‘소녀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외친지 몇십 년 되었는데, 유리 천정은 아직 금도 안 갔대요. 누구는 금 간 데가 있다고도 하던데 본 적이 없어요. 올라오는 사다리가 없어진 유리 바닥도 있대요. 나만 그렇게 느끼나? 그냥 엄마 찬스, 아빠 찬스 썼다고 퉁치니까요. 부모가 자식 사랑한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요. 정말 교묘해서 눈 뜨고 코 베이고 있다니까요. 울타리 안에서 자기들끼리 잘 먹고 잘살더라고요. 그런 울타리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작년에 그 방화 사건은 정말 통쾌하지 않았나요? 난 너무너무 시원했는데. 누가 했는지, 방법도 아직 모르고. 완벽한 시도가 기분 좋고. 아아……. 알아요, 알아. 거기까지만 할게요. 그래도 언니가 보기에 나처럼 어린 여자가 세상 살면서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닌 일 이해되죠? 제정신 갖고 연애하기도 힘들어요. 결혼식 자체를 아무나 못 하잖아요. 서로 좋아서 같이 살려고 하는데도 돈 지랄. 식당이나 쇼핑몰에 가면 유모차가 계급인 것 아시죠? 염병할. 애 낳으려 해도 돈 지랄. 내가 무슨 수로 그 돈을 모으면서 사냐고요. 후~~~. 죽을 때까지 모으면 되나요? 몇 년 뒤에 어떨지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은 제가 다른 얘보다 조금 낫네요. 에이 쌍. 그 친구 나빴어. 기분 좋았었는데 괜히 이야기가 이상한 데로 빠져서.
홀로그램 통신기 너머에 움츠린 노인은 세상이 변하는 불편과 불안을 무엇 때문에 청년에게 토로하고 있을까? 청년하고는 이번 거대 연중행사가 있기 전에 가볍게 술을 마신 적이 있다. 내가 청년에게 무언가를 베푼 정말 매우 특별한 사례다. 기지국이 사용하는 하드웨어 중에 평상시에는 데이터 전환용으로 사용하다가 외부 공격이 감지되었을 때는 방어용 무기로 전환되는 아르피지(RPG)가 있다. 보통은 인공위성 데이터를 받아 고객이 사용하기 쉽도록 전환해주는 역할을 한다. 외부 공격이 감지될 때에는 무자비할 정도로 데이터를 생성시켜 공격자에게 되돌려 보내는 기능을 한다. 공격자 위치만 파악된다면 공격자가 오히려 분산 서비스 거부 공격(DDoS)을 당하는 셈이 된다. 이 기계가 가져야 할 초깃값은 미세한 부분에 차이가 있어 다루기가 어렵다. 더욱 어려운 기술은 트라이엘넷에 제대로 접속시키고 안정된 매개변수를 발생하도록 세팅 값을 잡아주는 순서이다. 물론 설명서와 영상과 학습 도서 등이 준비되어 있어서 열심히 배웠다. 청년이 설명하면서 직접 보여줄 때는 감동 그 자체였다. 이 뻔한 표현이 얼마나 큰 지식 값어치를 지니는지 당사자만 안다. 물론 그 덕분에 기막히게 잘 돌아가는 기지국은 효율 부문 세계 랭킹 2위 기지국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잘 되는 일은 소장 몫으로 대부분 돌아갔었다. 그래, 돌아갔었다.
행정직이 퇴근하면서 프로그램 단추 하나를 누르지 않았다. 모레 만나면 신발을 벗어서 면상을 갈길 일이다. 그야말로 스티브 잡스가 비트코인으로 노점상 하는 꼴을 만들었다. 본사가 얻는 수익이 워낙 높고, 이곳이 우수 기지국이기 때문에, 적어도 먹는 수준만큼은 천국이다. 지난 3년간 기지국 사람이 외부에 주문하여 시켜 먹은 메뉴, 간식으로 먹은 과자나 과일이나 샐러드 목록, 요즘 인기 있다고 홀로그램 통신기에 돌아다니는 요리법 등을 모아놓은 데이터 집합이 있다. ‘고민하는 붓다’라는 이름을 가진 인공지능이 오전 간식, 점심, 오후 간식, 야근이 있다면 저녁 그리고 직원 복지 차원에서 아침밥까지 설계하여 제시한다. 사용자가 허락하면 주문하여 알맞게 맛있는 온도 상태로 대기까지 한다. 듣는 사람 처지에서 약 오를지 모르지만, 주문할 때 드는 어려움이나 가격 등은 전혀 고려 요소가 아니다.
붓다가 고민을 본격으로 한 이후, 기지국 사원 식당에서 함께 지내며 일하던 영양사, 요리사, 조리원 두 명 등 총 네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물론 기지국 사람 전체가 조금씩 양보하고 상호 공감을 통해 헤어지는 과정은 매우 상큼했다. 네 명을 위한 “전직 활동 안정화 대상”이라는 자격 인정받으려 할 때였다. 기지국 전체가 협조하는 작업이었다. ‘데이터 경제국’ 쪽에 제출한 모든 근거 서류가 거절되는 일이 이상하게 연속으로 발생했다.
다섯 번째로 네 명을 위한 재직 증명서를 제출할 때 그중 한 사람이 제출한 파일 안에 아주 자그마한 스테가노그래피 루틴을 삽입했다. 이게 RPG를 알아보고, RPG도 얘를 좋아한다. 루틴은 그 경제국에 자리를 잘 잡았고 RPG에게 사랑한다고 뻐꾸기를 날리기 시작했다. 뜨겁고 폭발하는 듯한 연애편지 분량이었으면 경제국도 곧바로 알아채고 방어하는 게 원칙이다. 다만 이 루틴에는 전직 활동 안정화 대상을 판정하는 그 부서만 특별히 미치고 폴짝 뛰게 만드는 목표물 지향 특성이 있었다. 그 부서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램만 느려도 너무 느려진 것이다. 이 정도 정밀한 세팅 값을 구현한 기법은, 청년이 거리낌 없이 나눈 지식 공유 덕분이다. 3일 뒤에 담당 부서에 업무 문의하는 통화를 하다가, 불편한 일 없냐고 슬쩍 들어주는 척했다. 그런 종류에 속하는 애로 사항 해결에 특히 자신 있다고 설명했다. 5시간을 예상한다고 했다. 대신에 최근에 연속으로 거절당하는 사례를 말했다. 그쪽도 큰 결격 사유는 없는 것 같다면서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왜 그런지 모른다고.? 너희가 배고픈 적이 없어서 그래! 썩어 문드러진 것들!) 해결만 된다면 당연히 금방 처리해주겠다고 말한다. 5시간은 개뿔. 5초도 안 걸리는 일이다. 클릭 2번에 엔터 1번이면 된다. 왜냐면 루틴을 철수시키는 세팅 값만 바꿔주면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소장이 슬쩍 눈감아 준 일이다.
아, 오늘 밤 꼴딱 새우려면 체력 충전, 에너지 저장이 되어야 하는데 초장부터 라면이라니. 청년이 유지해야 할 몸 상태가 슬슬 눈치 보인다. 괜히 상황실 한가운데 있는 1번 통제 모니터 배경 화면에 맥가이버를 띄워놓고 기다린다. 가끔 청년이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맥가이버를 부르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서로 해맑게 웃었는데.
베트남 딸.
아버지는 개새끼이다. 아비가 하나 있는 딸을 딸이라고 미워하다니! 그나마 매매혼이 아니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아버지가 호찌민시에 주재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나 보다. 그때 베트남 여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돈도 벌고 한국어도 배우면서 한국에 갈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는 그 회사에 몇 년째 다니고 있었다. 열렬하지는 않았겠지만 어쨌든 결혼이라는 걸 했고 한국에 정착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딸을 낳았다. 그 ‘한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네 부모와 아버지를 포함한 가족은 온갖 구박을 했다. 그리고 딸 낳았다고 미친 듯이 푸대접을 했다.
아버지는 개새끼이다. 베트남 여자는 수시로 손찌검을 당했다. 한국 음식을 못 만든다고 숟가락을 집어 던졌다. 한국말 못 한다고 남 앞에서 대놓고 쪽팔린다고 했다. 가장 흔한 이유는 딸 낳았다고 그랬다. 베트남 여자는 이제껏 길쭉한 반도에 살면서 딱 한 번 딸을 데리고 호찌민 친정에 간 적이 있다. 나는 말이 전혀 안 통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과 이모가 어색했던 기억만 있다.
아버지는 세상에 죄를 많이 지은 악인 같은 비참한 끝을 보여주었다. 요양병원에 누운 채로 5년을 보냈다. 진통제로써 모르핀은 어쩌다 사용하기로 의사랑 협의했다. 돈 때문이었다. 마지막 3년은 생명 유지 장치로 보냈다. 61살, 매우 젊은 나이에 일찍 죽었다. 물론 돈은 베트남 여자가 다 댔다. 얼마 전까지도 베트남 여자랑 싸울 때마다 그 돈을 왜 그 남자에게 썼냐고 악악거렸다. 결코, 뽑아내지 못할 비수인 줄 알면서도 말이다. (이 기지국에 부임하여 일하게 된 최근 몇 년은 그런 일이 매우 적었다. 아니, 거의 없었다.)
지금이야 피부색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구라도 피부색으로 시비 건다면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 오히려 날아오는 차별과 혐오를 더 세련되게 반사해줄 수 있다. 학교 다닐 때 피부색은 주위 아이와 다행히도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내가 인정사정 보지 않고 모질게 끝장 봤던 사건은 항상 베트남 여자가 크든 작든 무시당하는 경우였다. 몸으로 싸움하는 경우는 기술도 체력도 없었지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처절하게 제압했다. 막판에는 상대방이 상상도 못 할 악밖에 없었다. 생각해봐라. 중학교 2학년 학생이 흰 교복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 교복은 절반쯤 찢어진 상태로 이미 빨간 피 칠갑이 되어 있다. 그리고 한 손에 짱돌 들고 있는 모습을. 이때부터 무언가 반드시 이겨야 할 상황이라면 벼랑을 등지는 습관을 본능으로 배웠다. 이는 삶을 배우는 원리였고 전쟁터의 진리였고 진실이었다.
길쭉한 반도 남부에 있는 위성 기지국에 언젠가 근무할 상상은 했다. 본사로부터 발령 통보를 받은 배경에는 출생과 성장 환경을 활용하라는 눈에 안 보이는 기대가 있었다. 아버지가 죽고 혼자서 버티었을 베트남 여자와 재회하여 살림집 마련하는 일도 큰 기쁨이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우여곡절로 이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동등하게 대하는 훈련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도시는 갓난아기가 지난 십 년 동안 단 39명만 태어났다. 길쭉한 반도 데이터 공동체가 운영하는 행정 폴더 체계로부터 사라지기 한 걸음 직전에 되살아난 경우다. 우선은 아무래도 기지국 덕분이다. 기지국 자체가 엄청난 땅 넓이를 차지하거나 아주 많은 사람을 고용하는 마법을 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지국 순이익이 워낙 높다. ‘공동 경제 노동 위원회’에 내는 ‘종합세’가 엄청나게 거액이다. 덕분에 다른 공동체는 꿈도 못 꾸는, 도시에 재투자되는 프로젝트가 아주 많아졌다. 이러한 프로젝트 자체가 사람을 불러 모은다. 모인 사람이 또 일을 만들어내는 선순환이 자리 잡았다. 주변 사람이 가장 부러워하는 기획은 <제9구역 원도심 재생 프로젝트>이다. 시내에는 어차피 비어 있는 집이나 건물이 많았다. 데이터 공동체가 나름 신경을 써서 소유권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했다. 그런 다음 거의 새집처럼 환경과 조건에 맞게 수리했다. 그냥 숫자 나이로 18세 이상이면 누구에게나 무료에 가까운 극도로 낮은 거주 비용을 받고 25년간 빌려주었다. (역시 땅은 개인이 갖는 걸 되도록 줄여야 제맛이다) 대신에 무언가를 생산하여 공동체에 이바지한다는 증빙은 하여야 한다. 그 결과물이 새로운 노래와 연주와 그림과 공예품과 놀이와 앱과 만화와 음식과 관광 상품 개발과 로봇과 글 그리고 춤 등으로 나타난다. 누구는 정해진 구역을 청소하는 봉사로, 어떤 사람은 배관 서비스로, 또 다른 이는 벽돌 쌓기나 시멘트 미장해주는 노동으로 증빙할 수도 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은 헤어 디자이너이다. 당연히 추가로 돈을 더 버는 사람이 태반이다.
전임 소장 때부터 이미 근무하고 있던 청년과 일하는 궁합이 꽤 잘 맞았다. 청년이 가진 경험치는 진중하고 예의 바랐다. 스스로 자랑하자면, 돌멩이처럼 갖고 있던 돌파력을 탄력 높은 지성으로 바꾸는데 청년은 큰 거울이 되어주었다. 청년이 친구와 함께 운영하는 독서 토론 모임에 초대하였다. 한 번 참석한 일이 크게 영향을 주었다. (아, 기지국이라는 일터와 얼마나 다른 나른한 형식인가!) 매번 모임 주제는 다양하게 변했지만 언제나 질문을 찾는 특색이 있었다.
당연히 그냥 태어나지, 갓난쟁이가 태어나면서 무슨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요? 내가 신입니까? 내가 태어난 목적을 어떻게 압니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냐고요? 지금 장난합니까? 지난번 모임에서도 비슷한 질문 하던데 좀 먹고살 만한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사람 무늬가 뭐냐고요? 아니, 사람한테 무슨 무늬가 있어요? 설사 있다고 해도 내가 다른 사람 속을 어떻게 알아요? 아니, 내 몸에, 내 마음에, 내 생각에 무슨 무늬가 있어요? 환장하겠네. 이런 이상한 질문하고 답하고 그러다 보면 행복해집니까? 이러면서 뭔가 깨달은 체하는 겁니까? 산나물 뜯어 먹던 도인 되고 싶으세요? 내 인생 중 제일 안타까운 사람이 누구냐고요? 그야, 당연히 엄마이지요~!
와장창!!! 멀쩡한 얼굴로 눈 뜬 채 졸고 있는 비구니를 깨우는 죽비 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모임은 베트남 여자와 길쭉한 반도 데이터 공동체가 엉키고 설켜 온 입방체를 폭넓게 보여주었다. 모임은 베트남 전쟁이 길쭉한 반도 남쪽의 지금 기지국까지 연결되는 걸 설명했다. 모임은 호찌민 아저씨가 도이모이까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하도록 도왔다. 매우 짧은 시간에 유성우 쏟아지듯 자각이 넘쳐 흘러갔다. 엄마 혼자 살아온 생이 아니었다.
기지국이 하는 노동 계약과 노동 평가에 내가 개입하는 방식 자체를 지금 당장 어찌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일단 본사가 가진 운영 방침이 있다. 본사조차도 전 세계 데이터 공동체가 운영하는 방식을 많이 베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한 돈 받으면서, 내 집 장만하면서, 은행 대출받으면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문제는 드러나고 있다. 해결 방안으로 대안 제시도 무척 풍부한 편이기는 하다. 핵심 이슈는 울타리 안팎의 구별이 사실은 위아래 구분이라는 점이다. 이 문제는 실패한 실험이 많은 편이라서 여러 사람이 새로운 발상을 하는데 머뭇거리고 있다.
기지국이 본사로부터 포상으로 받을 고정 성과보수는 꽤 크다. 이 돈으로 기지국이 흔하게 맺는 계약 관계를 정규 관계나 영구 지원 관계로 바꿀 재원을 조사하고 구축하는 프로젝트에 투자하기로 했다. 기지국이 남기는 이윤 중에 보너스로 받을 돈도 있다. 이 돈의 대부분은 공개 소스로 제작된 택배 차량 공유 플랫폼을 앉혀놓은 클라우드 운영비에 투자하기로 했다. 짐작했겠지만 내 이익을 내놓은 게 아니다. 노동에 평가하고 개입하는 제도를 살짝 틀었을 뿐인데 가능한 일이다. 기지국 동료 사이에 연골이 닳아 뼈끼리 만나는 순간을 넘겨오며 만들어낸 그 결과가 이렇다. 이쯤 하여 확실하게 도장을 찍는 게 좋을 듯하다. 공동 경제 플랫폼을 돌리는 앱에 얽힌 더욱 자세한 시민 이야기는 꼭 해야 한다. 《브이 포 벤데타 조합》 이야기이다. (기대하시라, 3편을!)
연중행사도 무사하게 마무리되고 그럭저럭 평화가 넘치는 2주일이 지났다.
나침반, 햇살 그리고 바람.
오늘 하는 <미래 역량 워크숍>은 이미 알려드린 대로 자신과 공동체가 이룩할 세상을 상상하고 준비하는 힘을 키우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자리를 만들도록 도와준 깡패 같은 대장, 사실상 조폭, 하지만 손을 마주 잡았을 때 부드러운 동료인 베트남 딸에게 먼저 감사드립니다. 나머지 분은 모두 오늘뿐만 아니라 항상 최고 주인공이니까 소개 안 해도 되겠죠? 예? 그래도 하자고요? 그래요. 까짓거, 큰일도 아닌데. 그러면 우리 맥가이버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시계 반대 방향이라는 게 어느 쪽인지 아시죠?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첫 번째 세션을 시작합니다. 자, 이제 우리 모두 각자 개인 묘비명을 써보도록 합시다. 느닷없이 왜냐구요? 하필 죽음을 상상하냐고요? 가장 어려운 일을 가장 가볍게 해보자는 뜻입니다. 제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우리가 반드시 죽는 존재라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 안 죽고 끝끝내 살 수 있는 사람 있나요? 없지요? 우선 나부터 먼저 죽겠지요. 여러분에게 멀고 먼 이야기이겠지만. 그래서 실감이 잘 안 나겠지요. 여기 기지국 전체가 겪었던 일과 나누었던 이야기와 만났던 사람과 지나간 우주 먼지를 생각한다면, 단 몇 줄은 쓸 수 있을 거예요. 음, 오늘이 2050년 8월 14일인가요 15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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